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요시 요시츠구 (문단 편집) === 요시아키 세력으로 === 미요시 진영에서 모습을 감춘 요시츠구는 [[마츠나가 히사히데]]와 연합하여 [[미요시 산닌슈]]에게 반기를 들었다. 쇼군 옹립으로 인해 자신의 정치 사상이 무너진데다 [[미요시 산닌슈]]와 [[시노하라 나가후사]]의 지원과 관심이 끊김은 물론이고 경시에 가까운 눈초리를 받은 요시츠구가 환멸감을 느끼고 [[아시카가 요시아키]] 세력에 뛰어든 것이다. 요시츠구는 이제는 연합 관계가 된 히사히데와 합류한 후 4월에 사카이 근방에서 야마토 시기산 성(信貴山城)으로 이동 후, 12일에 마츠나가 세력의 본거지인 타몬 성(多聞城)으로 이동했다. 정황을 파악한 산닌슈는 곧바로 야마토로 진군하여 18일에 마츠나가 세력의 남쪽에 포진하고 마츠나가 히사히데와 대립하던 야마토의 호족 [[츠츠이 준케이]]와 공동전선을 펼치며 타몬 성에 공격을 시작하였다. 24일, 산닌슈는 타몬 성 근처에 있는 고후쿠지 근처의 산에 병사를 배치했으며 '철포소리가 밤낮을 메울 정도'로 격렬하게 싸워나갔다. 5월 2일에는 [[이와나리 토모미치]]와 이케다의 세력이 [[도다이지]]의 염불당(念仏堂), 이월당(二月堂), 대불전(大仏殿)회랑에 병사를 배치하였다. 한편, 요시츠구와 마츠나가 세력 역시 도다이지의 계단원(戒壇院)에서 농성하였기에 전쟁의 양상은 시가전으로 번져나갔다. 이 와중에도 히사히데는 외교전을 벌이며 8월 이후 이이모리야마 성의 마츠야마(松山)씨와 키슈의 하타케야마씨를 포섭하는데 성공하였고, 이들이 이즈미, 미나미 카와치, 야마토로 진군함에 따라 키나이의 정세는 말그대로 개판이 되어갔다. 교토에서는 아직 요시히데가 쇼군에 취임하지 못한 상태에다 동년 15일에 요시아키를 지지하고 있는 '''[[오다 노부나가]]가 결국은 사이토 타츠오키를 깨뜨리는데 성공하고 미노를 손에 넣게 됨으로써''' 키나이 세력에 폭풍전야를 예고하였다. 10월 10일, 마츠나가 세력은 대불전에 있는 산닌슈의 군세에 야습을 걸었다. 이 야습 도중에 화재가 발생하게 되고 이 불길은 법화당(法華堂)과 대불회랑을 지나가게 되어 오전 2시경, '''대불은 소실된다.'''[* 역사서에는 산닌슈의 진지에서 실화가 발생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야습으로 산닌슈 측은 이번 전투에서 패배했으나 그들의 군세는 이 정도로 꿈쩍하지도 않았고 타몬 성의 포위 상태는 지속되게 된다. 이후에도 요시츠구와 히사히데는 요시아키 연합에서 가장 눈에 띄는 군사 활동을 보이는 노부나가와 연락을 취하여 적극적으로 산닌슈 세력에 항쟁하였다. 당시 노부나가는 11월에 키나이 평정의 의지를 드러내고자 '천하포무(天下布武)'가 새겨진 주인장을 발급할 정도로 여전히 자신이 상락하는 것에 적극적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